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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_조홍식의 History of Tackle] 현대적인 주요 낚시 태클의 기원(21) 가장 좋은 루어는 가장 많이 팔리는 루어일지도 모른다
2024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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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_조홍식의 History of Tackle]


현대적인 주요 낚시 태클의 기원(21회)

가장 좋은 루어는 가장 많이 팔리는 루어일지도 모른다

Feat. Rapala


조홍식

편집위원, 이학박사. 「루어낚시 첫걸음」, 「루어낚시 100문 1000답」 저자. 유튜브 조박사의 피생랩 진행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낚시책을 썼다. 중학교 시절 서울릴 출조를 따라나서며 루어낚시에 깊이 빠져들었다. 9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 지깅 보급과 바다루어낚시 개척에 앞장 섰다. 지금은 미지의 물고기를 찾아 세계 각국을 동분서주하고 있다.



‘라팔라(Rapala)’라는 상표는 루어낚시인 사이에서 아주 친숙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처음 루어낚시를 배운 1980년대 초반에도 있었고 지금도 변치 않고 건재하다. 그 당시 어렵게 구한 라팔라의 미노우 루어는 똑같은 모델이 아직도 발매되고 있다. 이 루어의 고향은 북유럽 핀란드의 시골인데, 어떻게 미국에 상륙하여 전 세계를 휘어잡을 수 있었을까? 거기에는 왕년의 할리우드 스타, 당대의 섹스 심벌이자 아직도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고 있는 ‘메릴린 먼로(Marilyn Monroe)’와의 인연도 숨겨져 있다. 하도 유명한 이야기라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앵글러도 많으리라.



루어낚시 동호인이라면 누구나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을 라팔라 루어. 맨 위부터 3개가

초창기부터 생산되어 현재도 판매하고 있는 ‘오리지널 플로팅(Original floating)’ 모델.


1963년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던 라팔라 루어의 가격표. 5가지 크기에 가격이 1.95~3달러였다.

요즘 물가로 환산하면 대략 4만~6만 원에 상당하는 고가품.





세계의 많고 많은 루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제품이라면 핀란드제 ‘라팔라(Rapala)’를 손꼽을 수 있다. 루어낚시 동호인이라면 아마도 누구나 같은 대답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특정 브랜드를 옹호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고 객관적으로 봐서도 그러하다. 왜 그러냐 하면, 다른 브랜드에 비해서 그 생산량의 격차가 커도 너무 크기 때문이다.

라팔라의 하루 루어 생산량은 7만 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 수량은, 현재 유명한 값비싼 일본제 루어 브랜드별 총생산량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다. 생산 개수만으로 단순 비교를 하기는 어렵지만, 생산량이 많다는 말은 그만큼 팔리는 루어, 다르게 말하자면 잘 낚이는 루어라는 증거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라팔라의 창업자는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 1905~1974)’이다. 그는 1936년부터 루어를 손수 만들어 판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핀란드 시골의 루어 제작 공방이 거대한 기업으로 변모하는 과정에는 우연과 행운이 어우러진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

일단, 신기한 이야기는 그의 성이 원래 라팔라는 아니었다는 것. 라팔라는 그가 태어난 마을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없이 편모슬하의 그가 소년 시절, 어머니와 다른 마을로 이사를 하였을 때, 주민등록을 대행하던 현지 교회에서 태어난 마을을 성으로 잘못 기재하는 바람에 성이 라팔라로 굳어져 버렸다고 한다. 원래의 성은 ‘사리넨(Saarinen)’, 당시 교회의 신부님이 기록을 올바르게 했다면 현재 우리는 라팔라 루어가 아니라 사리넨 루어를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팔라 마을 출신, 라우리 라팔라(Lauri Rapala)


라팔라가 루어 제작자가 된 이후, 북유럽에서만의 유명세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미국에 진출할 수 있었는지는 크게 두 가지의 사건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 번째는 1952년에 개최된 헬싱키올림픽이었다. 올림픽에 참가한 미국 선수단 중에서 핀란드에서 유명한 라팔라 루어를 몇 개씩 구매해 귀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1950년대 중반 이후, 미국에서도 정말 잘 낚이는 루어로 입소문이 나면서 아는 사람은 아는 루어가 되었다.

이런 라팔라 루어를 ‘론 베버(Ron Weber)’와 ‘레이 오스트롬(Ray Ostrom)’이라는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수산물 도매업자와 낚시점주가 함께 적극적으로 수입을 시도하는데, 첫 주문 수량은 500개였다고 전하고 있다. 1960년대 초, 처음으로 미국 미네소타(Minnesota)로 수입된 500개의 라팔라 루어는 실은 판매가 부진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라팔라 루어가 너무 가벼워 캐스팅하기 어려운 데다가 가격도 너무 비싸서였다.

당시, 미국 국산 루어가 1달러 미만으로 구매할 수 있었던 데 비해 라팔라 루어는 크기에 따라 2~3달러를 호가했다. 1960년대의 물가 수준으로 보자면 1달러가 한화로 약 1만5천~2만 원 정도로 볼수 있는데, 라팔라 루어는 요즘 시세로 개당 4~6만 원에 달하는 고가품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라팔라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나일론으로 만든 모노필라멘트(monofilament) 낚싯줄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스피닝릴 사용이 늘어나면서 가벼운 루어의 사용이 편리해지자 라팔라 루어의 판매량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문량은 몇 배씩 늘어나 1961년 한 해 동안 3만 개로 증가했다고 한다. 당시 베버와 오스트롬의 회사는 라팔라의 독점수입권리를 획득하는데 그 회사의 이름이 현재 ‘Normark’로 알려진 바로 그 회사이다. 그들은 루어 수입에 대해 더 많은 투자를 결정하고 미국 내 판매망을 넓히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라팔라 루어가 미국에서 불멸의 신화를 쓸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1962년에 일어났다.


라팔라 신화의 결정적 계기는 1962년에


언론인 ‘마셜 스미스(Marshall Smith)’는 미네소타에 출장을 와서 미식축구팀인 미네소타 바이킹스(Minnesota Vikings)에 관한 인터뷰 기사를 작성하다가 그 동네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는 라팔라 루어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는 “A Lure Fish Can’t Pass Up(물고기가 거부할 수 없는 유혹(=루어))”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고 그 기사는 8월 발매예정인 라이프 매거진(LIFE Magazine)에 게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1962년 8월 17일자 라이프 매거진에는 당대 최고 인기의 여배우, 메릴린 먼로(Marilyn Monroe)의 인터뷰 기사도 실려 있었다. 그녀가 사망하기 이틀 전에 8시간이나 지속한 인터뷰로,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될 줄은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라이프 매거진이 발매되기 열흘 전, 그녀가 자살했다는 속보에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놀라버렸고 그녀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실린 라이프 매거진은 엄청난 판매 부수, 잡지 역사상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렸다. 덩달아 라팔라의 광고 효과도 어마어마했다. 그녀의 불행이 라팔라에게는 행운이 되어 하룻밤 사이에 주문량이 300만개, 100배나 늘어나는 효과를 보였다. 갑작스러운 주문 폭주로 핀란드의 라팔라 본사는 대응하지 못했고 돈을 빌려 새롭게 공장을 건설해야 했다고 한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동안, 미국 내 낚시점에서는 라팔라 루어를 20달러 보증금에 하루 5달러에 임대하는 악덕 상인도 나타났었다고 하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도 남아있다.




표지에 메릴린 먼로(Marilyn Monroe)의 사진을 게재한 1962년 8월 17일자 라이프 매거진.

메릴린 먼로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기사와 더불어 라팔라 루어의 기사도 실려 있었다.


메릴린 먼로의 인터뷰 기사와 더불어 게재되어 있던 라팔라 기사,

“A Lure Fish Can’t Pass Up”.(LauriRap_Hist5 by I.G.F.A, CC BY)


1962년 8월 6일자 뉴욕미러(New York Mirror) 타블로이드 신문.

전면에 메릴린 먼로의 자살 소식을 알리고 있다.


1950년대 북유럽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라팔라 루어는 1952년 개최된

헬싱키올림픽을 통해 서서히 미국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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