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안정효
모름지기 인간은 집단이 아니라 단독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진정한 경쟁력이 강해지고 창의력 또한 발전한다.
그래서 혼자 지내는 시간은 남들에게 빼앗기지 않는 소중한 재산이 된다.
남들과 소통하며 식견을 넓혀가야 마땅한 아까운 시간에 홀로 앉아 무엇인지를 멍하니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현대인이 많다.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은 지하철에 나란히 줄을 지어 앉아서 휴대전화의 좁디좁은 화면 속으로 영혼이 왜소하게 쪼그라들어 갇혀버리는 사람들의 착각이다. 쉴 새 없이 손가락을 놀려대는 지하철 승객들은 주변의 어느 누구하고도 소통을 하지 않을뿐더러, 자기 자신과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1941년 신사년에 태어난 뱀띠인 필자는 마포강변에서 자라 수영과 낚시를 유난히 좋아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래서 물을 워낙 가까이 하다 보니 “나는 뱀띠가 아니라 물띠”라는 농담을 자주 한다. 거의 매주일 짧게는 1박2일에서 길게는 3박4일씩 물가를 찾아가다 보니 1년이면 적어도 두 달은 낚시를 하는 셈이다. 그런데 당구나 볼링, 바둑과 고스톱까지 언젠가는 다 시들해져 그만두었지만, 유별나게 낚시만큼은 40년이 넘도록 정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나한테 누가 “왜 그렇게 낚시를 좋아하느냐”고 바보 같은 질문을 하면 냉큼 세 가지 대단한 이유를 들이댄다. 그 첫째 이유는 “후회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조용한 물가나 갯바위에 홀로 앉아 바다나 산이나 강을 쳐다보며 많은 시간을 보내노라면 생각이 무척 많아진다. 특히 여럿이 몰려다니는 바다낚시보다 호젓하게 혼자 떠나는 민물 조행이 그렇다.
낚싯대를 펼쳐놓고 앉으면 내가 무슨 일을 과거에 나 자신한테 잘못했고, 또 남들에게는 어떤 못된 짓을 했는지, 왜 나는 여태까지 인생을 그토록 각박하고 성급하게 살아왔는지 온갖 허물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그런 후회의 시간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고 제 길을 찾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갖추려고 자신과 인생살이를 점검하는 일종의 예식이라고 하겠다.
화창한 날씨가 며칠만 이어지면 내가 얼른 가방을 챙겨 집을 떠나는 둘째 이유는 생산적인 삶에 크나큰 보탬이 되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말한다. “컴퓨터가 책상 위에 놓인 작업실을 벗어나 두 시간 후 물가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나는 가장 많은 일을 한다.”
소설의 구상은 머리가 쉬는 동안 가장 잘 이루어진다. 글쓰기에서는 책상 앞에 앉아 실제로 써내려가는 단조롭고 기계적인 작업보다 영감이나 착상이 제멋대로 자유분방하게 떠오르는 과정이 훨씬 중요하다. 그러니까 글쓰기에서는 글을 쓰는 동안보다 오히려 안 쓰는 동안에 더 많은 실적을 올리게 된다는 역설이 유효하다.
또한 물에 뜬 예쁜 찌들을 지켜보는 동안에 나는, 지나간 나날을 되새기며 인생을 후회하듯, 지난 며칠 사이에 써놓은 장면들이나 대사들을 한가하게 하나씩 곱씹고는 한다. 그러면 거리를 두고 좀 떨어져서 그림을 감상해야 전체적인 느낌이 더 강렬해지듯이, 지금까지 써놓은 글에서 무심결에 저지른 실수나 미흡한 허물이 불현듯 머리에 떠오르고, 그래서 어떻게 고치면 좋을지 머리를 짜낸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보다는 물가에서 신선한 착상이 훨씬 활발하게 기능한다. 비단 글쓰기에서뿐만이 아니라 “휴식은 재생산”이라는 경제원칙은 인생만사 어디에나 적용된다. 등산을 가서 한 번도 안 쉬고 정상까지 올라가려고 하면 기진맥진해서 중간에 포기하기가 십상이다. 피곤하면 일단 쉬어야 사람은 기운을 차리고 걸음이 빨라진다.
남들과 소통하며 식견을 넓혀가야 마땅한 아까운 시간에 홀로 앉아 무엇인지를 멍하니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현대인이 많다.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은 지하철에 나란히 줄을 지어 앉아서 휴대전화의 좁디좁은 화면 속으로 영혼이 왜소하게 쪼그라들어 갇혀버리는 사람들의 착각이다. 쉴 새 없이 손가락을 놀려대는 지하철 승객들은 주변의 어느 누구하고도 소통을 하지 않을뿐더러, 자기 자신과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가만히 앉아 명상을 하는 그런 한가한 시간에 바삐 돈을 벌어야 하지 않을까 불안해지는 소시민적 사고방식의 포로들일 따름이다.
혼자 앉아서 낚시를 하는 사람은 한심하고 멍청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재생산의 경제원칙을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중이다. 좌선을 하는 스님들이나 피정을 하는 성직자들을 보고 시간을 낭비한다며 탓하는 사람은 없다. 명상하는 낚시꾼은 거룩한 창조자라고 나는 누구에게나 우긴다.
번거롭고 시끄러운 곳에서는 묘안이나 명상이 머리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기발하고 희한한 착상은 대부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혼자 있을 때 찾아온다. 여럿이 모여 둘러앉아 웃고 떠들거나 축구시합을 하는 동안, 또는 사무실에 모여 회의를 하는 경직된 자리에서 기막힌 제안이 즉흥적으로 생각나는 경우란 거의 없다.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사람들은 저마다 혼자 있을 때 머리를 짜내고, 여럿이 모인 다음에는 미리 준비한 내용을 발표하여 취합 과정을 거치기가 고작이다. 여럿이 모여 저마다 가진 생각을 공판장의 생선처럼 펼쳐 내놓고 다 함께 공평하게 타인들의 견해와 제안을 표절하여 어떤 결론을 엮어서 민주적으로 똑같이 나눠 가지면, 그것은 대단하고 유일무이한 별미가 아니라 냄비에 끓여 뚜껑에 조금씩 떠서 먹는 한 끼의 라면에 불과하다.
모름지기 인간은 집단이 아니라 단독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진정한 경쟁력이 강해지고 창의력 또한 발전한다. 그래서 혼자 지내는 시간은 남들에게 빼앗기지 않는 소중한 재산이 된다. 낚시를 가서 혼자 하루나 이틀을 지내면 앞으로 써야 할 소설 장면에 들어갈 대사나 소재들을 적어놓은 쪽지가 호주머니에 수북해지고, 그러면 나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 일을 하고 싶어 조바심이 일어난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들판에서 구상한 내용을 다 소화하고 나면, 나는 다시 정신적인 생산활동을 하러 낚시터로 달려가고 싶어 안달을 한다.
내가 자꾸만 낚시를 떠나는 세 번째 이유는 대부분의 낚시꾼들이 첫 번째로 꼽는 즐거움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고기를 낚는 기쁨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으니, 소나기 입질이라도 만나 고기가 지나치게 잘 낚이면 정신노동과 후회를 할 시간이 줄어들어서 탈이다. 그런들 어떤가. 처음 두 가지 목적이 방해를 받기 때문에 억울한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조금쯤 손해를 본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어쨌든 마지막 한 가지 즐거움 때문에 훨씬 중요한 두 가지 목적에 있어서 조금쯤 손해를 보더라도 그 또한 즐겁기 그지없으니, 세상에 이토록 수지맞는 놀이가 과연 몇 가지나 되겠는가.
필자가 처음 낚시에 취미를 붙였을 즈음에는 ‘꾼’들을 조사(釣士)라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선비 대우를 해주었다. 그래서 대나무 낚싯대 한 자루에 고기바구니를 들고 물가로 나가는 인물이 한국화에 주제로 자주 등장했으며,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중앙 일간지들은 지면이 겨우 4쪽이나 8쪽뿐이던 시절에도 매주일 전국 낚시 현황을 알리는 고정란을 실어 누가 어디서 월척을 낚았다는 소식을 널리 알리고는 했었다.
「낚시춘추」라는 허름하고 얇은 잡지가 선을 보이던 무렵에는 동네마다 주말이면 버스로 출조하는 낚시방이 있었고, 한때 낚시인구가 부쩍부쩍 늘어나자 나는 쌍둥이 두 딸을 초등학생 시절부터 데리고 민물낚시는 물론 얼음낚시와 바다 배낚시까지 늘 같이 다녔다. 딸들을 나처럼 물띠로 만들어서 혹시 낚시를 좋아하는 사위를 얻으면 늙어서 운전이라도 맡길까 싶은 못된 속셈에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중년에 이른 딸 하나는 수녀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당당하게 독신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선택하는 바람에, 나는 사위를 아예 구경조차 못하고 말았다. 더구나 사람들이 번거로운 주말을 피해 평일에만 조행을 나가다 보니, 나이가 들수록 동행이 하나둘 떨어져나가고, 칠순 중반 고령이 된 나는 직접 차를 몰고 혼자 돌아다녀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낚시는 자꾸 가고 싶으니 어쩌겠는가.
▲ 2007년 3월에 낚시춘추를 발행하는 황금시간에서 출간한 「인생 4계」. 안정효 선생이 낚시춘추 2004년 1월호부터 2006년 8월호까지 기고한 연재물을 묶은 수필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