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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연재_에세이] 불혹, 전갱이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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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_에세이]

불혹, 전갱이의 유혹

이병철

새해가 밝았다. 우리 나이로 마흔이 됐다. 나라에서 두 살 깎아준다고는 하는데……. 하여간 불혹이 된 기분은 더럽다. ‘불혹(不惑)’은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밴드에 올라온 여러 선사들의 조과 사진 몇 장만 보면 바로 유혹에 빠진다. 제주도 형님들의 카톡 몇 마디면 안달이 나 미칠 것 같다. 압둘라호와 방탄어부호가 제주 남부에서, 해성피싱호와 빅보스호가 제주 북부에서 연일 올리고 있는 빠가 참돔 조황에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거제도에서 딥 아징에 대전갱이들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진다는 소식에 홀딱 넘어가 2023년 첫 출조는 전갱이로 정했다. 40 노총각이면 하루빨리 여인의 유혹에 자빠져야 할 땐데, 메가리 따위에 넘어가서 두근거리는 꼴이라니. 거제 지세포 ‘배틀피싱호’에 출조 예약을 했다. 볼락대와 팁런대를 챙기고, 2000번, 2500번 릴을 태클박스에 담았다. 소위 ‘오모리리그’와 유사한 형태의 딥 아징 전용 리더인 바치콘리더 채비를 주문했다. 6호부터 15호까지 다양한 무게의 봉돌, 그리고 0.5그램부터 2.5그램까지 소형 지그헤드도 챙겼다. 7.5그램에서 10그램 정도 텅스텐 지그헤드도 채비 상자에 넣었다.

출조 전날 저녁 후배 이청록과 서대문구 모래내시장에 있는 노포 ‘닭내장집’에서 닭내장탕에 소주를 진탕 마시고, 노래방에서 락 발라드도 꽥꽥 부르니 새벽 3시. 청록의 일산 집에서 자고 11시쯤 일어나 거제로 차를 몰았다. 정말 겁나게 멀다. 휴게소에서 라면 한 그릇씩 먹고, 부지런히 달려 4시 반쯤 숙소인 디클라우드펜션에 짐을 풀었다. 초특가 야놀자에서 1박 2만 9천원, 총 2박에다가 선착순 할인 7천원을 적용 받아 5만 1천원에 예약한 숙소는 넓고, 깔끔하고, 심지어 오션뷰였다. 미친 가성비다.

출항 시간은 오후 6시. 숙소에서 차로 3분 거리인 지세포항에 5시 반쯤 가서 배에 탔다. 젊은 선장이 반갑게 맞아줬다. 워킹 배스루어와 붕어낚시 외엔 낚시 경험이 없는 청록에게 선상낚시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선미 쪽에 자리를 잡았다. 선미를 택한 것이 나중에 신의 한 수가 됐다.

중부지방은 한파에 꽁꽁 얼어붙었는데 거제는 따뜻했다. 움직이는 게 거북할까봐 두꺼운 패딩 대신 보다 가벼운 방수 재킷을 입었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바람도 없고 바다도 장판인데다 항에서 10분도 채 안 가는 지심도 앞이 포인트였다. 아직 봄은 멀지만, 봄기운을 느끼면서 낚시를 시작했다. 수심 25미터권. 8호 봉돌과 0.5그램 지그헤드를 체결한 바치콘리더를 주력 채비로 썼다. 지그헤드에는 청갯지렁이를 달았다. 먹고, 놀고, 쉬기 위해 온 낚시 여행이므로 무조건 맛있게, 넉넉히 먹을 만큼 잡는 게 중요하다. 생미끼, 아니 라이브베이트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내리기만 하면 입질할 줄 알았는데 불혹의 전갱이들이 좀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채비를 바꿔볼까 하는 유혹이 들었지만 나 또한 불혹답게 뚝심 있게 라이브베이트를 밀고 나갔다. 선수에서 입질을 받자 곧 선미에서도 입질을 받을 수 있었다. 찌그렁 찌그렁 하는 경쾌한 드랙음과 함께 30센티미터급 전갱이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다다다’하는 전갱이 특유의 파이팅이 손맛에 굶주린 겨울철 앵글러를 흥분시켰다. 손난로도 없는데 손이 후끈후끈 했다. 깔따구와 고등어, 새끼 참돔 따위가 손님고기로 올라왔다. 청록이도 전갱이 두어 마리 ‘어, 어’하며 꺼내더니 금방 패턴을 익혀 곧잘 잡아냈다.

뜰채를 대서 올릴 만한 5짜 슈퍼돼지전갱이를 기대하며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낚시에만 열중했다. 하지만 5짜는 불혹을 진작 작파한 지천명(知天命)이라 절대 잡혀주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둘이 연신 20 중반~30 중반급 청년 전갱이들을 뽑아내는데 선수 쪽은 고요했다. 전갱이낚시도 꽤나 자리를 타는 모양이다. 앞에서 하시던 분께 뒷자리를 양보해줬더니 금방 몇 마리를 올렸다. 이미 우리 살림망은 찰 만큼 차서 마릿수는의미 없었다. 철수까지 시간이 좀 남았지만 전갱이를 양동이에 부려놓고, 두레박에 물을 담아 피를 뺐다. 피 뺀 전갱이를 쿨러에 담으니 35리터 쿨러가 거의 가득 찼다.

입항하고 편의점 들러 술이랑 즉석밥을 사서는 숙소로 왔다. 잡은 것 중 씨알급 전갱이 네 마리를 꺼내 회 뜨고 초밥을 쥐었다. 초생강, 다진마늘, 쪽파와 함께 먹으니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다. 회도 기막히지만 초밥이 끝내준다. 찬바람이 불 때 전갱이는 지방을 축적해 맛이 기름지다. 청록이는 “전갱이가 이렇게 맛있는 생선이었냐”며 앞으로 고등어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기름진 전갱이에다 금복주 소주를 마셨더니 어느덧 새벽 3시가 넘었다.

이튿날, 느지막이 일어나 통영으로 갔다. “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엔 오전 내내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백석, 「통영 1」)다. 김냄새 나는 비가 내리는 낡은 항구에선 항상 고민이 깊어진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골목들을 지나,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백석, 「통영 2」) 서호시장에 가 ‘만성복집’ 졸복국을 먹느냐 아니면 그 옆 ‘원조집’이나 ‘훈이네’에 가 시락국을 먹느냐의 문제다. 한참을 갈팡질팡하다 만성복집 문을 열었다. 고민 없이 한 그릇 1만3천원 졸복국을 주문했다. 생긴 건 앙증맞지만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인 졸복 여러 마리와 미나리, 콩나물이 들어간 게 전부다. 아주 약간의 간만 되어 있는데도 바다 향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맛이 깊다. 국에 풍미를 더해주고, 졸복 살을 보다 탱탱하게 해줄 식초 몇 방울을 뿌린 후 한 숟갈 떴다. 해장하러 왔다가 술을 더 마시게 되는 집이 아닌가. 지역 소주인 화이트를 한 병 시켜 곁들였다.

낮술 마시고 서피랑길을 걸으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다 유혹이었다. 배가 빵빵한데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충렬도너츠’에서 꽈배기와 찹쌀도너츠와 소세지빵 등 종류별로 사서는 정자에 맨발 벗고 퍼질러 앉아 흰 우유와 함께 야무지게 먹었다. 어느새 비 개인 겨울 오후가 따사로운 햇살로 발등을 간질였다.

그날 저녁에는 지세포 하나로마트에서 산 자연산 섭, 키조개, 가리비, 석화, 동죽을 숯불에 구웠다. 당연히 삼겹살도 구웠고, 전갱이와 고등어도 구웠고, 집에서부터 챙겨온 무늬오징어도 구웠다. 조개와 돼지고기와 생선과 오징어가 번갈아 가며 유혹하는데 입에서 침이 질질 흘렀다. 불혹은 개나 주라지. 아직 멀었다. 

일러스트_탁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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