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_에세이]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이병철
연중 가장 큰 대물을 만날 수 있는 ‘빅 원(Big One)’의 계절이 왔다. 추자, 관탈, 중뢰, 절명 등 제주 북부권 필드에서 겨울철 산란을 앞두고 잔뜩 몸집을 불린 대부시리와의 짜릿한 한판 승부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시기에 운과 노력과 물때와 날씨와 노련한 선장과 우주의 기운이 합하면 개인 레코드를 넘어 공식 레코드에 등극할 만한 인생 기록 고기를 품에 안을 수도 있다. 이 시기 빅게임 앵글러들은 30킬로그램급 이상의 대물을 꿈꾸면서 쇼크리더를 묶고, 펜슬과 지그에 바늘을 매단다. 그러나 타이슨이 말했던가?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이라고. 이 명언을 제주 화북선단 해성피싱호 김상근 선장님은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꽝치기 전까지는”으로 바꿔 큼지막하게 배에 써 붙여 놨다. 낚시꾼들은 그 문구를 보면서 간장이 서늘함을 느끼곤 한다.
130센티미터가 넘는 대물 부시리와 함께, 수온 상승의 영향으로 꾀저립(와후)까지 펜슬베이트를 덮친다는 소식에 심란한 성인 비디오를 한 편 본마냥 몸이 달아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음은 벌써 물레방앗간에 가 떡을, 아니 제주 바다에 가 캐스팅을 치고 있었다. 가을 빅게임 시즌을 위해 큰맘 먹고 장만한 시마노 21 트윈파워 SW14000XG 릴을 개시해야 할 사명 또한 있었다. 에프마켓 인천점에 가서, 스텔라를 향해 자꾸만 향하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겨우 붙잡으면서, 그마저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구입한 트윈파워다.
이 릴로 어떻게든 큰놈 한 마리 걸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제주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10월 27일 목요일 9물, 물때도 좋고 날씨도 좋다. 제주도의 송협 형, 김성수 형, 카카 형, 김학용 형, 그리고 방탄어부호 김병훈 선장님, 여성 앵글러 김명진 님과 함께 압둘라호에 올랐다.
다들 베테랑 앵글러들이다. 항에 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 간식거리를 사는데, 마침 압둘라 장진성 선장님이 먼저 와 손님들 먹을 도시락을 구입하고 있었다. 겨울철 발 추위를 많이 타는 압둘라 선장님을 위해 선물로 준비해 간 잔카 매너티 방한 슈즈를 그 자리에서 드렸다. 뇌물이다. 정치나 기업에만 로비가 있는 게 아니다. 낚시에도 로비가 필요하다. 출항 준비를 마친 압둘라호는 새벽 여명을 가르며 난바다로 향했다. 사방이 어두운데 멀리서 희미한 푸른빛이 막 눈을 뜨고 있었다. 관탈도를 거치지 않고 곧장 절명으로 가는 길, 장엄한 아침 태양이 떠오를 무렵 그 이름도 비장한 절명여 부근에 도착했다.
175그램짜리 펜슬베이트에 싱글훅을 두 개 체결하고, 선수에 서서 힘차게 첫 캐스팅을 했다. 뒤이어 곧장 2번 선수, 3번 선수, 4번 선수…… 능숙한 팀워크를 발휘하며 여러 인원이 차례로 캐스팅을 했다. 저 멀리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착수한 펜슬베이트가 빠른 릴링과 스무스한 저킹에 의해 파장과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을 스쳐 올 때, 내가 부시리가 된 것처럼 입에서는 벌써 “퍽! 퍽!” 소리가 나고 있었다. 제발 좀 퍽! 퍽! 때려달라는, 일종의 유치한 주술이다.
하지만 던지고 감고, 던지고 감고를 반복해도 퍽! 하는 바이트는 들어오지 않았다. 위로 떠야 할 부시리와 방어들이 좀체 상층으로 올라오지 않고 바닥권에 있었다. 절명여를 포위한 수십여 척의 조업 배들은 연신 알방어, 중방어들을 올려내는 중이고, 빠른 판단을 내린 몇 사람은 캐스팅 장비를 뒷전에 꽂아둔 채 지깅으로 바꿔 200그램짜리 롱지그를 바닥까지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럴수록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선수에 서서 열심히 캐스팅을 했다. 왜냐하면 나는 트윈파워 14000번을 반드시 개시해야만 했으므로. 그러나 지깅에 꾸준히 고기가 올라오는 걸 지켜보면서, 이러다 조지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오는 순간 어느새 내 손에는 지깅 장비가 들려 있었다. 지그로 바닥을 찍고 하이피치 저킹을 죽어라 흔드는데, 덜컥! 입질을 받았다. 끌어올려 보니 70~80센티급 방어다. 이걸로는 어림도 없다. 최소 120센티 넘는 놈 얼굴은 봐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부지런히 흔들고, 감고, 내리고, 감고, 흔들고…… 이 중노동은 몇 번의 바이트로 더 이어져서, 알부시리와 중방어 몇 마리를 올렸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이럴 땐 인심 좋은 신선 같은 용왕님이 야속하다. “이 알부시리가 네 것이냐?” “아닙니다” “이 야드방어가 네 것이냐?” “아닙니다” “오호라 정직한 놈이로구나, 다 가져가거라!” “네?”
그러던 와중에 덜컥!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드랙을 째는 파워가 완전히 비교불가인 거대하고 강력한 입질을 받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 바다의 뿌리를 뽑아버리겠다는 듯 온몸으로 과격한 챔질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힘겨루기, 드랙이 사정없이 풀려나갔다. “병철아 드랙 이빠이 잠가라”라고 형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이게 최대한으로 잠근 거예요!” “스풀을 손으로 잡아라!” “어떻게든 해볼게요!” 쭉쭉 풀리던 드랙이 비로소 진정이 됐나 싶었는데, 로드를 파이팅벨트에 꽂고 펌핑을 시도할 무렵 로드팁이 허무하게 허공으로 솟고 말았다. 분명후킹을 제대로 했는데, 부시리가 머리를 돌려 질주하며 몸부림치는 와중에 바늘이 그만 빠진 모양이었다. 허무했다. 그렇게 귀한 찬스를 한 번 놓치고 말았다.
과연 기회가 또 올 것인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에 가까워지고, 나의 그럴싸한 계획은 점점 물거품이 돼 가고 있었다. 나는 부시리에게 제대로 처맞는 중이었다. 거의 그로기까지 몰려 넉다운 당하기 일보 직전, 용왕님이 보우하사 또 한 번의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아까 놓친 그 녀석만큼 힘을 대차게 쓰는, 손으로 전해지는 감각이 최소 메다 이십은 넘는 대물이 분명했다. 이번에는 초반 제압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드랙을 최대한 잠근 상태에서 손으로 스풀을 잡고, 로드 텐션을 유지하면서 침착하게 릴링을 했다. 그런데 저쪽 선미에서 누군가 입질을 받아 고기를 올리던 중 서로 라인이 엉켰다. 엉킨 라인을 푸는 동안 다행히 고기는 떨어지지 않았으나, 상황을 정리하고 다시 릴링을 이어나간 바로 그때 또 다시 허무하게 털리고 말았다. 라인을 푸는 사이 장력이 느슨해지면서 도망갈 구멍이 생긴 것이다. “내 잘못 아니야. 사람이 문제야” 압둘라 선장님이 외쳤다. 그렇다. 결국에는 사람이 문제다. 다 내 탓이다.
나만 허탈한 것은 아니었다. 킥복싱 챔피언이자 온몸이 근육 덩어리인 인간병기 김성수 형도 대물 부시리를 걸었다가 바닥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어마한 힘에 그만 채비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 운동선수가 왜 그래”라는 압둘라 선장님의 핀잔은 곧 자기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말았는데, 못해도 130 이상은 될 것 같은 대물을 올리다가 역시 털리고 만 것이다. “예전에 체육 선생님이셨다면서요. 체육 교수님이셨다면서요”하는 동생들의 장난 어린 놀림에 배 위는 웃음바다가 됐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마침내 카카 형이 133센티미터, 25킬로그램짜리 대부시리를 갑판에 올린 순간, 환호성이 터졌다. 수십 미터를 한 번에 수직으로 내리 달리며 드랙을 째는 대물의 위력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최대 드랙력 13kg 중저가 보급형 장비인 내 지깅용 릴 시마노 스트라딕 8000번을 야속하게 바라봤다.
인심 좋은 카카 형이 고기를 내게 줘서, 압둘라 선장님 동생인 장희동 형, 구자철 선수 에이전트인 김승현 형과 함께 ‘어림향’ 식당에 가 기름 찬 뱃살과 가마살과 초밥과 내장수육과 대가리 조림을 배터지게 먹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잡은 고기도 아닌데. 낚시꾼이 가장 초라해지는 순간이 바로 나는 꽝쳐놓고 남이 잡은 고기를 가지고 생색낼 때다. 나는 완전히 꽝쳤다. 아니 완전히 처맞았다! 그날 밤 잠결에는 배지느러미에 권투 글러브를 낀 부시리들이 돌아가면서 나를 뚜드려 패는 집단린치의 악몽이 펼쳐졌다. 다음날,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와 더 크고 더 날카로운 바늘을 잔뜩 주문했다. 그리고 21 시마노 트윈파워SW 10000PG를 떨리는 손으로 장바구니에 넣었다. 맨정신에 망설이고 있는데, 아마 술 좀 마시면 술김에 지를 것이다. 관탈, 절명 부시리들아 기다려라. 내가 다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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