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_에세이]
다시 쭈갑의 계절
이병철
2022년 ‘쭈갑’(주꾸미&갑오징어) 시즌이 드디어 열렸다. 1천만 낚시 인구라는 통계에서 가을철 쭈갑 낚시 출조객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이상일 것이다. 연중 오직 이 시기에만 낚시하는 분들이 많다. 그만큼 재밌고, 잘 잡히고, 맛있는 인기 만점의 낚시다. 9월 1일부로 금어기가 해제되면, 서해의 크고 작은 항구들은 그야말로 북새통이 된다. 선사들은 1월 1일에 가을철 쭈갑 시즌 예약 사이트를 오픈하는데, 나훈아나 BTS 콘서트 티켓 구하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주꾸미와 갑오징어를 향한 폭발적인 관심에 불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11월 말까지 예약이 꽉 차 버린다.
매년 벌어지는 이런 예약 전쟁에서 승리의 나팔을 부는 분이 바로 문학평론가이자 휴먼앤북스 대표인 하응백 선생님이다. 하 선생님은 문학가들의 낚시 모임인 ‘전조선문학가조사동맹’의 ‘서기장’을 맡고 계시다. 1월 1일, 컴퓨터 앞에 미리 앉아 수차례 예행연습을 마친 뒤 보령 오천항 밥말리호 예매 사이트가 오픈하면 놀라운 클릭 신공으로 9월부터 11월까지 매주 주말, 그리고 평일 황금 물때를 놓치지 않고 선점하신다. 그렇게 미리 수백만 원의 선비를 선입금하고, 가을이 되면 전조선문학가조사동맹 회원들과 동행 출조를 해 회비를 걷는 방식이다. 하응백 선생님의 수고 덕분에 나를 포함한 몇 사람의 시인과 소설가들이 매년마다 편하게 쭈갑낚시를 즐기고 있다.
예매가 치열한 경쟁이라면 주차는 그야말로 대란이다. 평일은 그나마 좀 나은데, 주말에는 전날 미리 가서 자리를 맡지 않는 한 항구 가까운 곳에 주차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주차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온갖 방법들이 동원된다. 나중에 합류할 일행을 위해 주차 공간에 텐트를 치기도 하고, 돗자리를 깔기도 하고, 테이블을 펼쳐 놓고 삼겹살 파티를 벌이기도 한다. 새벽에 항구에 도착해 주차 자리를 찾지 못한 일부 낚시객들은 ‘자리 맡기’를 따가운 눈으로 보기도 하지만, 하루 전날부터 미리 온 수고로움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하응백 선생님의 경우 모기장과 해먹이 결합된 조립식 텐트를 치고 노숙을 하신다. 서기장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9월 17일, 13물 좋은 물때, 좋은 날씨에 2022년 전조선문학가조사동맹 가을 정기 출조가 있었다. 이날 출조에는 문학계 낚시의 전설인 문학평론가 전영태 선생님께서 특별고문으로 동행하셨다. 1950년대 후반 한강 동호, 무시막, 뚝섬, 가래 여울에서 견지낚시로 입문한 전영태 선생님은 쏘가리 루어 낚시, 붕어 낚시, 감성돔낚시의 고수이시다. 가거도에만 50년 드나든 ‘명예주민’이시기도 하다. 그런 전 선생님께서 한 번도 안 해본 낚시가 바로 주꾸미 낚시다. 주꾸미 같이 작고 소박한 미시적 낚시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으셨던 것이다.그런 전영태 선생님을 하응백 선생님이 살살 꼬드겼다. 처음 하는 사람도 충분히 많이 잡을 수 있다고, 먹는 즐거움이 굉장하다고, 밥말리호라는 배가 알루미늄 선체에 가솔린 엔진을 네 개 달아서 조용하고 부드럽게 잘 나간다고, 제자인 병철 군이 옆에서 잘 모실 거라고……. 새벽 3시, 하응백 선생께서 오로지 낚시를 위해 장만한 스타리아가 경부고속도로 동천역 정류장 앞에 나와 계신 선생님을 픽업했다. 장석남 시인, 조용호 소설가는 미리 타 있었다. 오천항까지 가는 1시간 반 동안 낚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오천항에 도착해 여영현 시인, 백가흠 소설가와 합류했다. 백가흠 작가가 미리 도착해 항에서 멀지 않은 주차장을 확보해두어 다행이었다. 콩나물해장국집에 가 국밥을 시켜 놓고 가볍게 반주를 나눴다. 출조 전 새벽 국밥집에서 마시는 소주만큼 달달한 술도 없다. 한 병 더 마셨다가는 그냥 눌러앉고 싶어질까봐 아쉬움을 남긴 채 일어났다.
일러스트_탁영호
전영태 선생님은 처음 보는 광경에 연신 눈이 휘둥그레지셨다. 주차 대란부터 채비를 사기 위해 낚시점에 줄을 선 사람들, 장비와 쿨러를 들고 항으로 가는 인파의 긴 행렬 등 소문으로만 듣던 풍경을 직접 보니 주꾸미낚시의 대중적 인기가 비로소 실감나신 모양이다. 아침놀이 오천 앞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새벽 5시30분, 물살을 조용히 가르며 접안한 밥말리호에 올랐다. 첫 포인트에 도착해서부터 꾸준히 주꾸미가 올라왔다. 전영태 선생님은 처음에는 무게감 파악과 챔질에 어려움을 겪으시더니 몇 차례 시행착오 후 금방 감을 잡으셨다. 연신 주꾸미와 갑오징어를 올려 망에 집어 넣으셨다. 그렇게 수백 번 채비를 내리고 감아올리기를 반복하던 선생님께서는 “노가다도 이런 노가다가 없구만” 하셨다. 갯바위 감성돔 낚시랑은 또 다른 차원의 고단함을, 반복 노동의 고독함을 느끼셨다고.
이날 출조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먹방’이었다. 물때가 죽은 동안 하응백 선생님께서 산 주꾸미 다리를 깨끗하게 씻은 후 먹기 좋게 썰어서는 참기름과 깨소금에 버무려 주꾸미 탕탕이를 마련하셨다. 대가리는 따로 모아 갑오징어 통찜과 함께 쪄내고, 주꾸미라면도 넉넉하게 끓였다. 주꾸미 회를 맛보신 전영태 선생님께서 엄지를 세워 올리셨다. 짧은 시간에 이토록 푸짐한 쭈갑 한 상을 차려낸 전조선문학가조사동맹의 놀고먹는 내공에 감탄하신 것이다.
배부르게 먹고 더욱 힘내서 오후 낚시에 돌입했다. 한 마리라도 더 잡게 해주려는 밥말리호 송인호 선장님의 배려 덕분에 오후 5시가 가까울 때까지 낚시를 즐길 수 있었다. 입항할 때 지퍼백을 보니 일행 모두 풍성한 조과를 거뒀다. 전영태 선생님께서도 처녀 출조에 상당한 마릿수를 올리셨다.
스타리아를 타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 그동안 쭈갑낚시 비판론자였던 전영태 선생님께서 주꾸미 예찬을 늘어놓으셨다. 전 선생님의 화려한 입담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낚시는 한 사람의 세계인식, 나아가 존재론적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인 사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문낚시에서 생활낚시로의 전환은 곧 거시에서 미시로, 추상에서 구체로, 고독한 몰입에서 대중성으로의 전향이 아닌가? 하지만, 쭈갑을 예찬하면서도 선생님의 욕망은 엉뚱한 데로 비약했다. “병철아, 붉바리낚시 좀 가자”고. 이 낚시를 하면서 저 낚시 생각하고, 이 낚싯배에 올라 저 낚싯배 예약하는 게 낚시꾼 마음이다.
그날 저녁, 선생님 댁에서는 선생님 이름 음가를 활용한 별호 ‘저녁때’의 풍요로운 술상이 펼쳐졌으리라. 미식가는 한 가지 음식에 오래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지조대로, 칠순의 노조사인 선생님께서는 또 다른 풍요의 저녁때를 위해 갈치를 잡으러, 붉바리를 잡으러, 쏘가리를 잡으러, 감성돔을 잡으러 가실 것이다. 그 고기들을 주꾸미만큼 잔뜩 잡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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