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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연재_에세이] 섬진강의 봄 손님
낚시에세이

[연재_에세이]



섬진강의 봄 손님



이병철



봄이면 섬진강에는 두 손님이 찾아온다. 한 손님은 벚꽃이고, 다른 한 손님은 낚시꾼이다. 벚꽃이 피기 시작할 때 수온도 오른다. 강 깊은 곳 돌 틈에 박혀 긴 동면에 들었던 쏘가리가 마침내 먹이사냥을 시작한다.


광양 다압의 매화는 이미 꽃을 떨구었지만, 강변이 온통 분홍빛으로 환해질 때 매화는 강물로 흘러들어 금빛 쏘가리의 몸에 매화문으로 박혀든다. 물 밖과 물속에 꽃대궐이 차려지는 이 계절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번 봄에도 금어기 전까지 20일 남짓 되는 산란 전 시즌을 알차게 즐겼다. 3월 29일, 섬진강 벚꽃 구경을하고 싶다는 제주도의 송협 형, 그리고 JS 컴퍼니 바다루어 스탭인 윤지환 군과 함께 올해 첫 섬진강 출조에 나섰다. 밤 12시, 안산에서 출발해 새벽 4시 반에 포인트 앞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30분 눈 붙이고 낚시준비를 하는데, 초봄의 추위가 옷 틈으로 파고들었다. 3시간쯤 낚시한 첫 포인트에서 쏘가리는 볼 수 없었지만, 윤지환 군이 잉어를 걸어 올리느라 한참 씨름하는 걸 구경하는, 아니 놀리는 즐거움이 컸다.


밥 먹고 숙소 가서 눈 좀 붙이기로 하고는 곡성 읍내 ‘소머리국밥’으로 향했다. 가게 이름도 따로 없이 상호가 그냥 ‘소머리국밥’이다. 나는 이 집을 포항 죽도시장 장기식당과 함께 대한민국 소머리국밥의 양대산맥으로 친다. 남원, 대강, 신기리 쪽에서 곡성읍으로 가는 길에는 멋진 메타세콰이어 길이 있다. 그 길 느릿느릿 지나 이 집 국밥까지 먹어야만 나의 섬진강 출조는 제대로 시작되는 셈이다.


낮잠서 깨니 같은 계절이 맞는지 땡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이스커피를 들고는 압록유원지 여울 징검다리에 앉아 강물에 발 담그며 노는데, 주머니에서 그만 차키가 흘러나와 강물로 퐁당 빠져버렸다. “×됐다!” 팔을 걷어붙이고 물속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차키는 잡히지 않았다. 콸콸 흐르는 된여울은 캄캄하기만 하고, 낚시고 뭐고 다 조졌다는 불안감이 드는 그때, 윤지환 군이 “잡았다!” 소리쳤다.


다행히 떠내려가지 않고 돌에 걸려 있던 차키를 건져낸 것이었다. 4짜 쏘가리 잡은 것보다 훨씬 훌륭한 일이 아닌가. 차키 못 찾았으면 진짜 ×될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시동 걸고 포인트에 가 저녁 피딩을 보는데, 오후 일곱 시쯤 윤지환 군이 여울꼬리에서 쏘가리 한 마리를 걸어냈다. 잉어와 차키와 쏘가리까지 잡아낸 그를 우리는 ‘다잡아꾼’이라 부르기로 했다.


다음날은 꽃구경에 집중했다. 곡성 압록유원지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구례 계산리다. 예성교 건너 파노라마펜션 지나 두가헌까지 이어지는 이십 리 벚꽃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그야말로 벚꽃 천국, 꽃잎의 대설주의보. 화개장터와 쌍계사에 가는 차들로 19번 국도는 늘 주차장이 되지만, 곡성과 구례계산리 구간은 한적하기만 하다. 황홀한 꽃비에 흠뻑 젖은 채로 두가헌 전통 찻집에서 향기로운 꽃차를 마시니 봄은 바깥이 아니라 내 몸 안에 있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꽃길을 시커먼 사내 셋이 함께 걸었다는 사실이 이내 치욕스러워졌다. 송협 형은 와이프가 있고, 윤지환 군은 여자친구라도 있지 나는 그야말로 ×도 없는 쌩 노총각, 풀어놓은 동네 개마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즐거웠지만 어딘지 씁쓸했던 첫 조행 이후, 조홍식 박사님과 함께 다녀온 두 번째 출조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벚꽃은 다 졌지만, 쏘가리 손맛은 실컷 봤다. 4월 12일 새벽 5시 반에 포인트 도착, 아침 두어 시간 낚시에 나도 조 박사님도 마릿수 손맛을 봤다. 조 박사님은 섬진강에서 씨알급 쏘가리를 잡은 게 거의 30년만이라며 기뻐하셨다.


흡족한 기분으로 또 소머리국밥을 먹고, 낮잠을 자고, 오후에 꺽지낚시 좀 하다가 피딩타임 맞춰 다시 아침 포인트로 들어갔는데, 반가운 손님이 왔다. 낚시복 내쇼날보이 대표인 장정민 형이 서울에서 내려온 것이다. 그날 저녁 토종닭백숙에 진탕 마시고, 아침에 올라간다던 정민 형을 붙잡아서 다음날 함께 낚시했다.


늦잠을 자 아침 피딩은 못보고, 죽곡면 ‘시골밥상’에서 오리불고기와 돌솥밥 점심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서 보성강 포인트로 진입했다. 정민 형은 섬진강 합수부와 가까운 곳에서 낚시하고, 나와 박사님은 차를 타고 좀 더 아래로 내려왔다. 낚시를 시작한 지 10분 만에 박사님께서 30 중후반급 쏘가리를 걸어내셨다. 나는 좀처럼 입질을 받지 못하다가 박사님의 활약에 자극 받아서는 열심히 웨이딩하며 이곳저곳 던졌다. 그러다 결국 4짜 중반급의 빵 좋은 봄 쏘가리를 걸어내고야 말았다. 헤비싱킹미노우로 돌무더기를 노린 것이 주효했다. 환호성이 터졌다.


정민 형과는 희비가 엇갈렸다. 꺽지 몇 마리만 만난 형은 그날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다. “찔레꽃무늬 그녀석이 이렇게 잡기 어려운 물고기인가 생각하는 하루. 상류에서 선배님의 3짜 후반에 이 작가의 45짜리. 나는 누구인가 여긴 또 어딘가 생각만 하는 하루”라고. 그래도 그날 저녁에는 온갖 낚시 무용담과 함께 풍요로운 술자리가 펼쳐졌다. 제철 두릅 데침에 이어 찰지고 담백한 쏘가리회가 상에 올랐고, 회를 다 먹고나자 곡성 흑돼지 삼겹살과 쏘가리 매운탕이 또 술맛을 돋웠다.


정민 형의 호출로 섬진강쏘가리루어 운영자인 조능희 씨가 남원에서 곡성까지 와 술자리에 동석했다. 동갑이라 바로 친구 먹었다. 민박 주인 아주머니가 내어준 하늘수박 담금주를 나눠 마시며 우리는 진하게 취했다. 쏘가리 넉넉히 만나고, 술도 잘 먹고, 친구도 사귄 뜻 깊은 조행이었다.


금어기 하루 전인 4월 19일, 잔카 장순철 부장님, 조유신 대리와 촬영차 다시 한 번 섬진강을 찾았다. 아침낚시엔 실패하고, 오후에 구례 동해마을 여울로 들어가 저녁까지 낚시했다. 곡성에서 구례로 가는 길에 철쭉이 장관이었다. 철쭉에 마음을 뺏기면서도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봐 내심 불안했다. 잘 나오던 고기도 꼭 카메라만 들이대면 안 나온다. 초조해진 나는 카메라에 대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입질할 때 되면 몇 마리 입질 할 겁니다”, “하지만 입질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쏘가리 낚시는 조과보다 자연을 벗 삼아 힐링하는 낚시입니다” 말인지 된장인지 구구절절 늘어놓는데, 다행히 여울상목에서 웜 낚시로 한 마리를 꺼내고, 초저녁 여울꼬리에서 또 한 마리를 꺼냈다. 피딩이 제대로 걸렸나 싶었는데 쏘가리는 안 물고 눈치 없는 모래무지들만 덤벼들었다.


중간에 4짜급 씨알을 걸었다가 빠트린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카메라 앞에서 대상어를 잡아냈으니 체면이 살았다. 게다가 철수 직전, 장순철 부장님이 생애 첫 쏘가리를 낚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했으므로, 부족함 없는 출조가 됐다. 며칠 뒤에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보니 ‘섬진강 쏘가리낚시의 달인 이병철 시인’이라는 자막이 붙어 있어 참으로 민망했다.


구례에서 흑돼지돈까스 먹고 서울 오니 자정 넘어 남부지방 금어기가 시작됐다. 이렇게 또 한 계절이 가는구나. 신기하게도 섬진강 금어기가 시작되면 그동안 더디던 시간이 물살처럼 빨리 흐른다. 금방 더워지고, 이제 또 한치, 갈치 시즌이다. 낚시의 사계절은 지구보다 더 성실하다. 94리터 대장쿨러를 꺼낼 때가 됐다.

이게 또 내 관짝이 될지도 모르지만, 올해는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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