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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연재 에세이_ 그리운 낚시 이웃들
낚시에세이

연재 에세이

 

그리운 낚시 이웃들

 

이병철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오늘의 냄새>, 산문집<낚;詩 - 물속에서 건진 말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가 있다. 쏘가리 낚시동호회 ‘팀쏘가리’ 회원. 루어낚시를 비롯해 다양한 낚시를 즐긴다.


“Fishing neighbor” 직역하면 낚시 이웃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을 지난해 6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앤드류에게 들었다. 그는 러시아 볼고그라드 출신의 실력파 앵글러로 타이멘 원정길에 나선 나를 현지에서 가장 먼저 맞이해준 팀원이다.
작년 6월 2일, 세계 곳곳의 괴어를 탐사해온 원정낚시꾼 엄일석 군과 함께 하바롭스크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석 군이 자신의 아름다운 꿈에 나를 초대해줬다. 먼저 꿈꾼 이가 그려놓은 꿈의 지도를 편히 읽어 나아갈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2년 동안 아무르 타이멘 원정을 준비했다. 일석의 헌신과 희생, 배려, 영민함 덕분에 나는 많은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무임승차자의 자의식을 지닌 나는 지금도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하바롭스크 공항에 내리자마자 극동러시아의 서늘한 공기가 운동화와 청바지 사이 빈 발목을 칭칭 감았다. 다소 고압적이고 까다로운 입국수속은 등골을 더 시리게 했다. 입국장을 통과하자 웬 산적 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 가이드의 총책인 디마, 그리고 우리와 함께 캠프에 합류할 앤드류였다. 앤드류는 매년 여름마다 디마의 캠프에서 타이멘낚시를 즐겨온, 사실상 가이드나 마찬가지였다. 에밀리야넨코 효도르도 때려잡을 것처럼 생긴 디마와 러시아 마피아 중간보스쯤 되어 보이는 앤드류는 생긴 것과 달리 웃음이 헤프고 장난기 넘치는 익살꾼들이었다. 우리의 짐 가방을 양손에 번쩍 들고 차에 실으려는 앤드류를 내가 만류했을 때, 그가 말했다. “괜찮아! 우린 낚시 이웃이잖아!”
그날 저녁, 호텔 근처 중식당에서 기름진 요리와 맥주를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셨다. 600km 비포장길을 달려 아무르강 오지에 가기 전 최후의 만찬이었다. 더치페이에 익숙한 앤드류는 우리가 자기 몫까지 계산해주자 당황하면서도 무척 고마워했다. 한국에서 챙겨온 내 책을 한 권 선물했더니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는 그 종이뭉치를 품에 안고선 눈가가 촉촉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그는 더 살가운 낚시 이웃, 아니 낚시 가족이 되었다.
아무르강의 6월은 백야에 가까워 밤 아홉시쯤 해가 져서 새벽 네 시면 날이 밝았다. 텐트 안으로 빛이 스며들어올 때, 새소리와 함께 러시아 최신 유행 댄스곡이 들려오면 아침이었다. 텐트 밖 화로에는 벌써 모닥불이 타오르고, 가이드인 올렉이 타준 홍차를 마시며 몸을 따뜻하게 하는 동안 곁에서 주방장 토마스는 부지런히 아침을 준비했다. 그가 뚝딱 끓여낸 러시아 전통 수프 보르쉬와 ‘카라스프’라고 부르던 정체불명의 물고기 튀김—대물 붕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맛을 잊을 수 없다. 식사를 마치면 디마는 아무데나 피어 있는 풀을 뜯어와 먹어보라며 내밀곤 했는데, 그 풀은 씹을수록 단맛이 나 입가심에 좋았다.
첫날 낚시에서 꽝치고 두 번째 날 타이멘을 낚는 데 성공했을 때, 앤드류는 자기가 낚은 것보다 더 기뻐했다. 캠프의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낚시 일과를 마치고 베이스캠프에 복귀하면 그날의 조과 사진을 서로 자랑하며 보드카 잔을 부딪쳤다. 하루는 내가 쓰던 세인트크로익스 레전드스트림 3피스 로드가 부러져 망연자실해 있는데, 앤드류가 자신의 낚싯대를 선뜻 내줘 그걸로 미터급 타이멘과 파이크, 레녹 등을 신나게 낚아냈다. 나와 일석을 전담한 가이드 마이클과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많이 들었다. 무뚝뚝하고 표현에 서툰 그와 우리는 일정 초반 은근한 기 싸움을 벌였는데, 후반에 가서는 형제처럼 끈끈해졌다. 마지막 날 낚시에서도 타이멘을 낚으며 유종의 미를 거둔 우리에게 마이클은 “You guys are the best taimen anglers”라고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작별하는 날, 그는 나를 포옹하며 울었다.
벨로루시 출신의 안드레이는 불곰 같은 외모와 다르게 다정하고 섬세한 친구다. 이 친구는 하바롭스크로 복귀하는 길에 들른 아무르강 본류에서 1미터20센티미터급의 노란뺨잉어를 낚는 쾌거를 올렸는데, 랜딩에 성공하는 순간 어린아이처럼 팔짝팔짝 뛰며 환호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우리는 같은 호텔에 묵으며 인근 레스토랑에 가 문명세계의 음식을 실컷 나눠 먹었다. 하바롭스크에 며칠 더 머무는 안드레이는 다음날 새벽 일찍 공항까지 와 우리를 배웅해줬다. 그와는 지금도 페이스북 등을 통해 안부를 주고받는다.
포르투갈과 노르웨이에서 만난 낚시 이웃들도 그립다. 포르투갈 라고스에서 ‘블루샤크호’를 타고 낚시를 즐긴 2018년 12월은 행복했다. 레드 스내퍼, 화이트 브림, 옐로우 브림, 그루퍼, 대형 갑오징어 등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가운데 낚시를 마쳐야 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뭉클해졌다. 늙은 선장 루스와 그의 친구 마누엘, 그리고 나 셋이 함께 후미에 서서 낚싯대를 드리울 때, 라디오에선 마침 ‘We are the world’가 흘러나오고, 늦은 오후의 해거름은 대서양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내가 잡은 갑오징어가 마누엘의 얼굴에 먹물을 뿜던 순간, 루스와 나는 눈물을 흘릴 만큼 박장대소했는데, 그건 삶에서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완전한 평화였다. 천진한 아이들처럼 "컴온 피쉬!"를 외치며 낚시하던 우리는 석양을 등진 채 항구로 돌아왔다.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고 헤어질 때 끌어안았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했으니까. 그렇게 서로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낚시 이웃이 되었다.
2016년 3월,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50km쯤 떨어진 ‘뤼그라’의 한 갯바위에 섰다. 합사 0.8호 낚싯줄에 16파운드 쇼크리더, 4분의1온스 지그헤드에 4인치 그럽 웜을 끼워 캐스팅해 70센티미터가 넘는 금빛 대구를 낚아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석장 뜨기 한 대구 살을 맥주와 통후추, 소금으로 밑간한 다음 올리브유 두른 팬에 구웠다. 대가리와 뼈, 내장은 마늘, 양파, 당근과 함께 스튜를 끓였다. 그 요리를 룸메이트인 마이크와 나눠 먹었다. 이탈리아의 재패니즈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녀석에게 맛보인다는 게 부담됐지만, 다행히 그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뼈에 붙은 살점까지 쪽쪽 빨아대면서, 우리는 알뜰하게 대구 한 마리를 해치웠다. 마이크는 어설픈 한국말로 “대박”을 외치며 ‘쌍따봉’을 날렸다.
아, 언제쯤 다시 이국의 물가에서 낚시를 즐길 수 있을까? 일석은 올해 태평양 GT와 일본 북해도 사할린 타이멘 원정을 계획했고, 가까운 몇 년 내에 원정낚시 뜨내기인 나와 함께 대서양 연어를 낚으러 유럽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국가 간 항공 교류가 제한되면서 우리의 ‘지구촌 괴어 대탐험’은 무기한 보류되었고, 세계 시민들이 사랑해 온 ‘하나의 지구’ 역시 머나먼 추억이 되어버렸다. 지금 이 시간에도 목숨 걸고 코로나와 싸우는 의료진들이 있는데, 철없이 낚시 투정이나 하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낚시라는 행위가 아니라 피부색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낚시 이웃’들과의 만남일 뿐이다.
얼마 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한 백인 경찰이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눌러 사망케 한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미국 사회는 들끓고 있다. 인종차별과 흑인 혐오,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극렬한 반대 시위가 미국 내 140여개 도시에서 일어나는 중이다. 조지 플로이드 씨의 명복을 빌면서, 이 세계에서 인종, 가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길 함께 기원해본다.
199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낯선 존재의 본질적인 이질성, 즉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시도를 ‘치명적 도약’이라고 불렀다. 낯선 타자가 내 마음으로 들어와 내 안에서 특별한 존재가 될 때, 나 역시 존재의 본성이 새롭게 전환되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치명적 도약의 체험을 가장 쉽게 이루어주는 것은 낚시다. 자연이라는 어머니 품에서 함께 낚시하는 순간 나와 당신, 우리는 모두 낚시 이웃, 낚시 형제다. 가장 좋은 이웃은 낚시 이웃이다. 낚시 이웃만큼 각별한 사이도 없다. 같이 갯바위를 타며 손잡아 끌어주고, 수상좌대에서 사나흘 동고동락하면 원수끼리도 이웃이 된다.
‘코로나 시대’가 하루빨리 종식되어 앤드류와 함께 섬진강에서 쏘가리낚시를 즐기고 싶다. 또 어느 낯선 강과 바다에서 새로운 낚시 이웃들을 만나고 싶다. 지금껏 만난 모든 낚시 이웃들, 그리고 언젠가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될 무슬림, 히스패닉, 아프리칸, 이누이트, 유대인, 인디언 혼혈 낚시 이웃들의 건강과 안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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