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연재_낚시콩트 씁새 (274)
군도, 민란의 시대
어쩌면, 지금 이 상황도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내려놓으세요! 안 됩니다. 칼 내려놓으세요!”
잔뜩 긴장한 경찰이 소리쳤다.
“그게 저기허니라고, 저기헌 건디… 이게 저기가 아녀.”
녀석은 여전히 이 황망한 사태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쭈뼛거리고 있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대화로 하세요. 칼 내려놓으시고, 대화로 하세요.”
경찰이 녀석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고, 다른 경찰은 몰려든 구경꾼들을 제지하며 본서로 연락 중이었다.
“물러서세요. 위험합니다. 본부! 본부! 지금 웃통 벗은 부랑자가 칼을 들고 난동 중입니다. 지원 바랍니다. 위험하니까 뒤로 물러서세요!”
하지만 녀석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저기라니께유? 이게 뭔 저기여? 나는 그냥 저기하러 온 저긴디?”
녀석이 씁새들이 있는 쪽을 가리켰는데, 하필 칼을 든 손으로 가리켰다.
“우오오오오!”
주위에 빙 둘러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지르며 우르르 물러났다.
“위험해!”
경찰이 드디어 권총이 들어있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다대며 소리쳤다.
“내려놓으세요! 불만이 있으시면 말로 하셔야지, 흉기를 들고 난동을 피우시면 어쩝니까? 진정하시고, 칼 내려놓으시고, 찬찬히 얘기해 보세요.”
잔뜩 긴장한 경찰이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얼레? 이게 뭔 저기냐니께유? 우덜은 저기허러 온 저긴디? 우덜 저기들이 저짝에….”
녀석이 칼 든 손으로 다시 씁새들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진정! 진정!”
본부로 무전을 친 경찰도 합세하여 녀석을 포위하며 말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단이 일어나게 된 것도 어쩌면 예견되어 있었다. 다만, 일이 이리도 크게 번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뿐.
“누구? 봉식이? 8동에 사는 그 봉식이? 아파트 정문서 통닭집 하는 봉식이?”
호이장놈이 승합차 문을 열며 물었다.
“그려. 그 봉식이. 갸가 우덜허고 낚시를 가고 싶다네?”
씁새가 트렁크에 낚시장비를 넣으며 대답했다.
“갸는 낚시헐 줄 모를 거인디?”
총무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낚시는 못 허는디, 오늘허고 내일 가게를 쉰디야. 내부공사 헌대드만. 그렇다고 우덜 낚시 가는 데 쫓아가서 바람이라도 쐬겄다는겨. 지가 닭허고 음식허고 준비허겄다니께 그러라고 혔구만.”
씁새가 대답했다.
“그 봉식이, 그놈이 술만 처먹으문 윗통 까는 놈 아녀? 접때두 돼지네서 술 먹다가 웃통 깠다드만. 그놈 술버릇이 여간 고약시러운디?”
회원놈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지랄맞은 놈이 술만 안 마시문 사람이 그리 좋아. 근디 술만 입에 들어가문 웃통을 까! 술만 배때지에 들어가문 그리 더워서 못 견딘대는겨.”
호이장놈이 의심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봉식이란 녀석은 씁새들이 사는 아파트의 정문에서 작은 프랜차이즈 통닭집을 운영하는 녀석이었다. 사람 좋고, 인심도 좋아서 가게도 잘 되는 편이었는데, 녀석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웃통을 몽땅 까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웃통을 까고서 행패를 부린다든지 하는 것은 아닌데, 녀석과 술을 마시다보면 어느새 웃통을 홀랑 까고는 해맑은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녀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기 자신도 언제 웃통을 깠는지 모르게 까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술을 마시면 모든 말이 ‘저기’로 시작해서 ‘저기’로 끝난다는 것이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그니께, 저기 있잖어유? 그 저기 하니께 우리두 저기한겨유. 그렇다고 노바닥 우리만 저기 할 수는 없잖여유? 그때는 그냥 기분도 저기 하다 보니께 그냥 저기 한겨유.(우리 가게 인테리어 있잖어유? 남들 가게가 다 인테리어 하니께 우리두 인테리어 하는겨유. 우리라고 항상 우중충허니 있을 수 없잖여유? 그려서 기분도 상하고 해서 이참에 인테리어 다시 하는겨유.)”
웃통 까고 저기라는 말로 끝을 보는 것이 녀석의 술버릇이었지만, 딱히 남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았다. 씁새 패거리와 같이 낚시 따라다니는 거시기 녀석과 같은 과일 것이다. 다만 거시기는 평소에도 거시기라는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하지만, 이 녀석은 술이 들어가면 저기라는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형님덜 모두 나오셨네유?”
봉식이가 커다란 배낭을 메고 나타나며 말했다.
“그려, 봉식이. 자네 신신당부허는디, 낚시터서 술 먹고 웃통 까덜 말어. 아예 술을 먹덜 마!”
호이장이 봉식이를 보고는 말했다.
“그려. 웃통 함부로 까덜 말어. 그나마 사람덜 있는디서 웃통 까문 그건 깽판이여. 근디 아랫도리 까문 그건 범죄여.”
씁새가 봉식이의 짐을 짐칸에 넣으며 말했다.
“이건 또 뭔 개소리여?”
호이장이 승합차의 시동을 걸며 말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서산 쪽의 OO리 방파제였다.(확실한 지명 생략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워낙 황당한 사건이라 지명을 생략했습니다.) 선상낚시를 하려고 했으나, 방파제에서도 굵직한 우럭과 농어가 잘 나온다고 해서 연안낚시를 하기로 한 것이다.
“날씨 좋다.”
방파제에 도착하고 낚시장비를 준비하는 사이에 씁새들처럼 방파제로 낚시를 온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해, 어느새 방파제가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지가유, 형님덜 괴기 잡으문 회 칠라고 몽땅 준비했구먼유.”
씁새들이 낚싯대를 드리우는 사이에 봉식이가 배낭을 주섬주섬 열더니 큼직한 회칼을 빼들며 말했다.
“그건 뭐여?”
“회칼여유. 지가 첨에는 일식집을 차릴라고 회 뜨는 연습도 허구 그랬지유. 그때 사놨던 칼여유.”
녀석의 회칼이 햇빛에 반짝 빛이 났다. 소문대로 방파제낚시가 곧잘 되는 편이었다. 손바닥만 한 우럭이나 노래미도 올라왔지만, 제법 횟감으로 쓸 만한 녀석들도 드물게 올라왔다.
“이쯤허고 까자!”
호이장놈이 낚싯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녁나절, 어스름하게 황혼이 물들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려. 인자 밤낚시 채비허야 쓰겄다. 원투대도 날려야 헐 거인디.”
“지가 맛나게 회를 썰겄습니다요.”
여하튼 봉식이놈의 회 뜨는 솜씨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노래미 회와 술에 취해 봉식이가 술만 들어가면 웃통을 깐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술이 떨어졌는디? 밤에 또 한 잔 할라문 술이….”
“지가 냉큼 사오겄어유.”
씁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봉식이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방파제 초입 주차장 옆의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으레 녀석의 주사처럼 웃통을 까버린 것이었다. 더구나 녀석은 우럭 회를 뜨던 그대로 회칼을 손에 든 채였다.
“선생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칼 버리시고, 대화로 풉시다.”
경찰들은 봉식이의 주위를 에워싸고 봉식이를 진정시키고 있었고, 봉식이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칼을 든 채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중이었다. 웃통을 까고 무시무시한 회칼을 든 이상한 놈이 방파제를 활보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한 상황이었다.
“그게유, 저기… 지가 여기를 저기하러 왔는데유, 우덜 일행이 저짝에서 저기를 허고 있는디유.”
봉식이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고, 구경꾼들은 모여들고, 경찰의 연락을 받은 지원병력까지 달려와 일대가 극악한 범죄와의 대치상황으로 변해 버렸다.
“이게 뭐대유?”
“회사서 노임 떼처먹어서 화가 난 노동자가 저 난리인개벼.”
“아녀. 사회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랴.”
“그려? 보기에는 조직폭력배 같은디?”
“마누라가 도망갔댜. 그려서 마누라 찾아오라고 저 행패랴.”
“아녀! 여기 시장 상인인디, 장사가 안 되고 허니께 정부에 불만을 얘기하려고 저러는거랴.”
구경꾼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소문과 의심과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다.
“얼레? 봉식이 뭐허는겨?”
술 사러간다던 봉식이는 오지 않고 방파제 초입에는 경찰차가 달려오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비명과 고함소리가 난무하자 어찌된 일인지 살피러 왔던 씁새패들이 이 황망한 사태를 보고는 봉식이에게 소리쳤다.
“형님! 이게 뭔 저기래유? 지가 뭔 저기했다고 경찰덜이 저기 헌대유?”
씁새를 본 봉식이가 와락 뛰어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앗! 안됩니다. 뒤로 물러서세요! 칼! 칼!”
“덮쳐! 칼부터 뺏어!”
“이게 아녀! 오해여유!”
봉식이에게 달려간 씁새, 호이장, 회원놈, 총무놈을 향해 경찰들도 달려들었다.
“그려서… 술 먹고 웃통 까는 게 버릇여유? 그려서 회칼은 그냥 무의식 중에 든겨유?”
지구대의 경찰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려유… 지는 술도 안 취허구유, 술만 들어가문 그냥 웃통을 나도 모르게 벗구유….”
봉식이가 온 얼굴에 눈물범벅으로 말했다.
“예미… 아주 온 지랄을 헌다.”
씁새가 봉식이의 등짝을 후려갈기며 말했다. 다행히도 봉식이 녀석은 풍기문란으로 벌금을 맞았을 뿐,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되지는 않았다. 씁새패들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던 효과도 있었겠지만. 그 후로도 봉식이는 가끔씩 웃통을 까고는 동네를 활보하고 있다.(끝)